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서 대분열 (문단 편집) == 진짜 분열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54년의 분열 자체는, 사건 그 자체만 보자면 900년 넘게 이어질 성질이 아니었다. 실제로 1054년 이후로도 두 교회는 교류를 계속 했으며, 50여 년이 지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에 교황이 응하는 식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두 교회가 동질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단순히 종교와 신앙에 기반한 전쟁이 아니었다. 교황, 서방 국가, 동로마 제국 모두 각자의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실제로 성지를 수복하였으나,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현란한 외교술은 장기적으로 동로마의 외교적 평판을 깎아먹었으며 외교술이 뛰어난 콤니노스 왕조의 대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등 경제적 이득을 중시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1204년 결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은 '''1054년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분열'''를 일으켰다. 동로마 제국의 땅은 분열되었고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세운 괴뢰 [[라틴 제국]]은 한심한 꼴로 몰락했다. 결국 분열된 정교회권 나라들은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먹히게 되었다. 더 큰 비극은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서로를 다른 집단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 [[공의회]]를 통해 두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미하일 8세]]&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에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가 나오자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정교회가 가톨릭의 입장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미하일 8세 사후에 여러 사정으로 흐지부지됐다. * [[요안니스 8세]]&교황 [[에우제니오 4세]] 때 열린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도 정교회가 가톨릭의 필리오케를 수용하고 가톨릭의 수위권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11세]]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했지만 동로마의 국내 여론은 오히려 나빠졌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이라서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동로마인들은 "정교회 신앙이고 뭐고 일단 살고 보자" vs "저 악마 같은 라틴인에게 머리숙이느니, 차라리 이교도의 손에 긍지 있게 죽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터번으로 덮히는 게 낫다. 튀르크족은 최소한 우리에게 즘미로서 정교회를 믿을 권리는 준다"며 국론 분열을 일으켰다. 이미 그 시점에서는 종교의 문제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멸망시킨 후, 통합 반대파 성직자인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를 세계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밀레트 제도]]를 통해 국내 정교도를 관리했고, 통합 찬성파가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도 흐지부지됐다. 그 이후 러시아의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외한 전 정교회권이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두 교회는 완전히 단절되었는데, 교황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교황령]]으로 망명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이용하여, 그의 딸 조이 팔레올로기나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동서 교회를 재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는 결혼식을 치른 후 동로마 황녀와 결혼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차르]]라고 자칭하며[* 이후에도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국호는 유지하다가 손자인 [[이반 4세]]의 치세에 [[루스 차르국]]으로 바뀌었다.]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함으로써 [[통수]]를 날렸고(...), 이로써 마지막 통합 시도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두 교회 간에 어떠한 통합 논의도 없어서, 동방과 서방은 각자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신학적인 괴리는 갈수록 커졌다. [[근대]]에는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세력이 강성해진 [[러시아 제국]]이 '정교회의 수호자'임을 강조하면서 정교회권과 가톨릭권의 알력이 다시금 드러나게 되었다. 다행히 현대에는 가톨릭-정교회의 상호교류가 늘면서 상당한 신학적 진전이 있는 중이고, 과거보다는 의견의 차이를 좁혔다.[* 물론 동서대분열 이후 1000년 가까이 독자적인 신학의 길을 걸어갔으니 여기서 생기는 차이도 있지만, 이건 어쨌거나 양측 모두의 공동 전승과 교부들에 기반했기에 생각만큼 큰 차이는 아니다. 가령 성모몽소승천은 동서대분열 이후 가톨릭에서만 확정된 교의이지만, 이 전승 자체는 정교회도 공유한다. 당장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 이름이 [[https://en.wikipedia.org/wiki/Dormition_Cathedral,_Moscow|성모승천성당]]이다. 또한 [[헤시카즘]] 영성의 경우 동서대분열 이후의 정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발달시킨 영성이지만, 엄연히 분열 전의 공통 전승에 기반한 영성이다. 따라서 분열 후의 헤시카즘 영성도 가톨릭에서 딱히 이단시하지 않고 영성서적에서 긍정적으로 자주 소개된다. 교황과 총대주교의 권한 논쟁의 경우도,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미미하다. 이건 신학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의 영역이고, 약 1000년간의 공통 역사 동안 쌓인 문헌의 양은 막대하다. 그렇기에 가톨릭과 정교의 논쟁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벌어진 일에서 어떤 교의적/규율적 명제가 도출되는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어쨌거나 1000년간 공통 문헌을 공유하니, 성경의 단편적인 언급에 기반하는 가톨릭&정교-개신교의 논쟁보다 훨씬 대화가 편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